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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10·19사건이란?

Development of the Yeosu·Sunchoen 10.19

여순사건의 전개

여순사건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제14연대 병영에서 봉기한 병사들은 곧바로 여수경찰과 철도경찰을 물리치고 여수를 점령하였다.

그 뒤, 지창수의 지휘 아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600여 명의 병사들이 여수역에서 5량의 기차와 차량을 강제로 거두어 10월 20일 오전 9시 20분,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순천 점령
경찰과 교전 뒤 순천 점령

10월 20일 아침, 순천에 도착한 봉기군은 순천에서 경찰과 교전한 뒤, 이날 오후 순천을 점령하였다. 이때 순천에 파견되었던 14연대 일부 중대는 선임 중대장인 홍순석의 지휘 아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순천을 점령한 뒤 1,000여 명 정도의 봉기군은 남원을 향해 북진하였다.

10월 20일 오후에 순천 북쪽으로 전진한 봉기군은 순천 학구삼거리에서 처음으로 진압군의 저지를 받았다. 진압군은 이정일이 지휘하는 제4연대였다. 이곳에서 2차례의 교전 끝에 진압군의 저지선을 뚫지 못한 봉기군은 다시 순천 일대로 퇴각하였고, 순천으로 돌아온 봉기군은 김지회의 지휘 아래 주변의 곡성, 보성, 구례 등지로 흩어졌으며, 10월 21일 이후 진압군의 진압 작전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란군에 고한다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포고문을 발표

한편, 여수에 남아있던 14연대 병사 일부는 광양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진압 부대가 제2차로 여수를 공격하기 앞선 10월 25일 새벽에 묘도를 거쳐 백운산 쪽으로 물러났으며, 14연대의 주력이 떠나간 여수 지역에는 지역민들만 남아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에서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였으며, 송호성은 특별기편으로 10월 21일 오후 1시, 광주에 도착하였다.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0월 20일, 진압 작전이 시작될 때는 3개 연대를 동원한 작전 계획을 세웠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진압군의 진압 작전에는 총 5개 연대의 10개 대대와 경비행기 10대로 구성된 1개 비행대, 해안경비대 함정 등이 동원되었다.

정부군 여수 탈환
10월 27일, 진압군은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여수·순천 지역의 진압 작전은 마무리

여순사건 진압 작전에는 5,000여 명의 군인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봉기군의 저항이 강하자, 진압군의 진압 작전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기 때문에 10월 21일, 진압 작전은 다시 조정되었다. 광주의 제4연대는 서쪽으로부터 여수를 포위, 전주 제3연대는 대전의 제2연대와 협력하여 북쪽으로부터 여수 포위, 군산의 제12연대는 여수의 북서쪽을 향해 군산을 출발하고, 부산의 제5연대는 바다로부터 포위를 유지하며, 대구의 제6연대는 여수의 북쪽 산맥을 횡단, 마산의 제15연대는 여수의 동쪽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진압군의 진압 작전은 여수를 중심으로 사방을 포위하여 봉기군을 섬멸하는 압박 섬멸전이었다.

10월 27일, 진압군은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여수·순천 지역의 진압 작전은 마무리되었고, 이때부터 진압군의 작전은 남원, 구례, 백운산 그리고 지리산 지역의 봉기군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콘텐츠 담당자

최종수정일: 2024-05-13